따뜻한, 난 : 마음 채움

더울 때마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Text. 이병률(작가) Illust. 다나

나는 여름에 자주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아무래도 겨울의 공기와 그 따뜻한 분위기를 그리워해서다. 크리스마스를 떠올릴 때마다 크리스마스 때 여행하면서 놀랐던 일 세 가지가 생각나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좀 적어놓아야겠다.

첫 번째 놀란 이야기. 러시아 여행을 계획하면서 크리스마스 시기에 맞춰 일정을 잡았다. 하지만 그곳에서 이국적인 크리스마스의 낭만을 보러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특유의 들뜸이라든가 축제를 맞이하는 분위기는 없고 조용해도 너무나도 조용했다. ‘아, 러시아에는 크리스마스가 주요 명절이 아니구나.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다니…’ 싶었다. 그러다 며칠 뒤에 알았다. 러시아는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을 쓰지 않고 그들만의 달력을 쓴다고 했다. 우리가 그레고리력을 쓰고 있다면 러시아는 율리우스력을 써서 1월 7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했다. 하필 나는 크리스마스를 실컷 즐기고 난 다음 1월 6일에 러시아를 떠나는 일정을 잡았던 것이다.

두 번째 놀란 이야기. 아이슬란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다. 아이슬란드는 인구가 적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꽤 한적할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큰 나라에 인구가 고작 34만 명이라니. 그런데 이건 무슨 일인가. 중심가의 규모가 워낙 작기도 해서였겠지만 거리에는 도무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게다가 이건 또 무슨 일인가. 가만히 아주 조용히 벽에 기대 선 채로, 행복한 얼굴로 밤 분위기를 즐기는 여행자들과 술과 흥에 취해 시끄러운 사람들까지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사람 구경을 못한 아이슬란드 지방 사람들이 일부러 차를 몰고 먼 길을 달려와 도심의 축제를 관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바깥 세계를 선망하는 눈빛들이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트리의 불빛보다도 더 고왔던 기억이 나에겐 있다. 사람 구경을 하는 마음 안에는 분명, 사람들 온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

세 번째 놀란 이야기. 나는 그때 체코 프라하를 여행 중이었고, 크리스마스 시즌이었다. 그냥 조용히 방 안에서만 지내겠다던 나의 계획은 아침 식당에서 마주친 핀란드에서 온 친구 덕분에 깨졌다고 할 수 있다. 동양인과 가까이서 대화해 보는 게 처음이라며 두어 번 합석을 했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친구는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해했다. 나는 별로 설명할 게 없다고 생각하다가, 나라 전체가 크리스마스를 축제로 여기는 서양에 비해 우린 그냥 친구들끼리 조촐한 모임 같은 걸 갖는다고 말했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뭘 하는데?”

잔뜩 기대를 갖고 묻는 그녀에게 나는,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서 나눠 갖는다고 대답했다. 사다리타기 게임도 설명했다. 그리고 내가 준비한 선물이 누구에게 돌아갈지는 알 수 없지만, 그중에는 내가 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너무 재밌고 로맨틱하다며, 핀란드의 그녀는 자신이 마치 반장이라도 되는양 크리스마스 저녁 모임을 꾸리기 시작했다. 벌써 투숙객들하고 그렇게나 친해진 건지 모든 사람에게 선물을 하나씩 준비해서 저녁에 만나자면서, 한국의 사다리타기 문화도 설명하는 것 같았다.

조금 고민이 되었다. 누구에게 줄 무엇을 사야 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고민이 되는 건 당연했으며 그것도 어떤 누가 저녁에 모이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는다면 사랑하는 사람하고 같이 있었겠지. 아니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같이 있지. 그 어쩌지 못하겠는 크리스마스 공기를 피해서 도망 온 거지.’

비누로 결정했다. 계산을 하면서 가게 주인이 선물을 할 거냐고 묻는데, 그 질문에 내가 고개를 많이, 그것도 여러 번 끄덕였던 탓일까. 내용물보다 포장이 과대한 비누를 보니 창피한 기분마저 들었다.

선물을 교환하는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사람들이 가지고 온 건 하나의 선물이 아니었다. 누구에게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여성용 남성용 장갑을 각각 두 개씩 준비해온 사람, 다 같이 나눠먹자며 피자 두 판과 스파클링 와인에 플라스틱 잔까지 사온 사람, 여행 짐을 담아왔던 바퀴 달린 여행 가방에 사탕, 쿠키, 열쇠고리, 인형 등을 가득 담아와서는 모든 사람에게 한 줌씩 나눠주겠다는 태세로 끝도 없이 계속 꺼내는 사람까지. 그 모습에 나는 그만 뒤로 나자빠질 뻔한 것이다. 크리스마스에 왜 하나의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받아들일 유전자가 서양인들에겐 아예 없다. 그에 비해 확실히 우리의 크리스마스는 사랑하는 한 사람, 그 대상의 존재감이 중요해졌고. 나부터도 이렇게 시끄러운 분위기가 적응이 안되고 재미없는걸 보면….

“자, 사다리타기는 어떻게 하는 거라고 했지?”

한 사람이 나를 향해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물었지만 나는 여전히 난감했다.

사다리를 타긴 타야겠는데 단 한 사람만 정해서 이 모두를 몰아줄까.

아니지. 그러다 매맞지.

이병률

시인이자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수많은 여행을 통한 글 작업과 사진 작업을 병행하는 작가로 눈길을 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등 다수의 시집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내 옆에 있는 사람>, <혼자가 혼자에게> 등 여러 권의 사진 산문집이 있다. 현대시학작품상, 발견문학상, 박재삼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