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난 : 마음 채움

타인의 아픔을 들으며,
비로소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순간

비로소
나다움을 찾는 시간

Text. 정여울(작가) Illust. 다나

슬픔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맞이하는 것이 나의 본분이었다. 나의 따스함은 기쁜 일이 생겼을 때 희희낙락하는 것이 아니라 슬픈 일을 피하지 않고 그 슬픔을 겪는 이와 함께할 때 피어났다. 물론 슬픔을 끌어안는 것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고, 대체로 물러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에 약하다. “너밖에 없었어. 내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어디 말할 데가 없었어요.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선생님이 생각났어요. 선생님이라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것 같아서요.” 그런 말에 나는 와르르 무너진다.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된다.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그 사람의 고민을 들어주어도 괜찮다.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사람들은 나에게서 무엇을 본 것일까. 그건 어쩌면 그냥 꾸밈없는 나다움이 아니었을까. 나는 나 자신의 고민도 어찌 해결하지 못할 때조차도 타인의 고민 앞에서는 무너져버린다. 그런 내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다. 나에게 뾰족한 수도 없으면서 무슨 남의 고민을 들어준다는 것인지. 하지만 신기하게도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사람들은, 내가 대단한 묘수를 내어주지 못했는데도 빙긋이 웃으며 고맙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조홧속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는 그렇게 ‘힘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있음’으로써 더욱 저마다 자신다워지는 것 같다. 힘들고 외롭고 쓸쓸할 때야말로 ‘내 말을 들어주는 귀’가 필요하지 않은가.

“선생님, 저 고민이 있어요.”

평소에 공적인 일 이야기만 할 뿐 개인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K가 어느 날 나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직장 상사가 자신의 실력을 견제하고, 사사건건 모든 일에 개입하려 해서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라는 이야기였다. K는 단정하고 모범적인 사람이고,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매우 드문 사람이기에, 나는 그의 이야기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사회생활에서는 질투가 가장 무서운 적이다. 질투 때문에 사람들은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기도 하고, 주변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기도 한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찌 이리 사회생활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아팠다. 오후 내내 K의 이런저런 고민을 들어주었는데,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마다 다행히도 K의 얼굴이 밝아졌다. 비로소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아서 그 무겁던 마음이 조금씩 환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K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이건 K씨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이예요. K씨가 실력도 뛰어나고, 인간관계도 좋고, 무엇보다도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걱정이 별로 안되는 걸요. 반대로 생각해 봐요. 능력도 없고, 인간관계도 안 좋고, 조직생활에 영 적응을 못해서 생긴 일이라면, 갈 길이 멀잖아요. 그런데 K씨는 그 모든 걸 잘 해내서 질투를 받고 있는 것이니, 이건 괜찮아요. 그 사람에게 더욱 더 잘 해줘요. 단, 억지로 하지 말고, 확신을 가지고 잘 해줘요. 지금 K씨를 질투하고 힘들게 하는 그 상사에게, 칭찬도 해주고, 좋은 말도 많이 해줘요. K씨가 그 상사에게 방해되는 사람이 아니라, 결국 도움이 될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요. 그럴 거잖아요. K씨는 그런 사람이잖아요.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도 결국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큰 사람, 착한 사람, 좋은 사람.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자신을 지켜내야 해요. 자신을 지키는 일과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헷갈리면 안돼요. 그 상사가 옳지 않은 길로 인도할 때는 과감하게 거절하세요. 그게 K씨 자신을 지키는 길일 때는, 착해보이려 하지 말고 용감하게 옳은 길로 나아가세요.”

K의 얼굴은 밝아졌다.

“고민을 말할 사람이 선생님밖에 없었어요. 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제가 잘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주셔서 너무 좋아요. 제가 선생님 말씀처럼 그렇게 멋지게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냥 제 이야기를 들어주신 것만으로도 좋아요.”

신기한 순간이었다. 비로소 내 쓰임새를 찾은 기분이었다. 온 힘을 다해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의 아픔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그의 곁에 있어주는 것.

그것이 비로소 ‘나다움’을 찾는 시간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이야기에 숨은 아픔과 사연을 온몸으로 품어주어야 비로소 마음이 탁 트이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정여울

KBS 제1라디오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나의 어린 왕자>, <가장 좋은 것을 너에게 줄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저자. 가장 사랑하는 것은 글쓰기, 가장 어려워하는 것도 글쓰기, 그러나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것도 글쓰기인 행복한 글쟁이.
나를 키운 팔 할은 ‘책과 걸핏하면 사랑에 빠지는 심장’과 ‘성취보다는 좌절에서 오히려 의미를 찾는 습관’이다. 매일 상처받지만, 상처야말로 최고의 스승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