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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을 지아비 삼아 사람들을 뜨겁게 품는 곳
- 부산 동래온천
부산 동래온천 부산의 진산(鎭山)인 금정산의 품에 안겨 사람들을 뜨겁게 맞이하는 곳. 동래온천의 역사를 살피면 신라 시대까지 거슬러 오른다. 세월을 헤아리니 1,300년이 훌쩍 넘는다. 부산의 모태가 동래이기에 동래온천은 부산이 대한민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하는 데 마중물이 되지는 않았을까? 금정산을 지아비 삼아 지어미가 되어 사람들을 뜨겁게 품고 있는 동래온천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금정산은 지아비, 동래온천은 지어미 “동래온천을 아늑히 품고 있는 따뜻한 손이 있으니 그 손은 말할 것도 없이 금정산이다. 금정산은 그리 아름다운 산은 아니나 그리 밉지도 않은 산이다. 금정산을 지아비라면 동래온천은 지어미다. 금정산과 동래온천이 있어서 비로소 이곳의 아름다운 풍경은 벌어지는 것이다.”
부산 여행을 앞두고 부산의 모태가 된 동래구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러다 우연에 이끌리듯 일제강점기에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한 노자영의 수필 <온천장 순례기>의 내용을 접했다. ‘꿈을 안은 동래온천’이라는 부제가 달린 글이다.
이런 이유로 금정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래온천과 이웃한 금강공원을 목적지로 여행길에 오른다. 대한민국에서 첫손에 꼽히는 도시가 자랑하는 명산을 거닐고, 그 여정의 고단함을 국내 최고라 불리는 온천에서 풀려는 속셈이다. 금정산은 울창한 송림과 다양한 형태의 화강암이 어우러진 명산으로 금정산성의 17km에 달하는 성곽과 4대문이 있어 선조의 숨결까지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40대 이상의 부산시민이면 누구나 금강공원에서 보냈던 즐거운 추억을 갖고 있다. 케이블카를 비롯해 동물원과 식물원, 놀이기구까지 두루 갖추었던 가족 나들이 명소였기 때문이다. 70~80년대 절정기에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방문했다. 비록 세월이 흘러 동물원은 문을 닫고, 놀이기구도 지난해를 끝으로 운영을 멈추었지만, 금정산의 우거진 송림으로 향하는 발길은 끊이질 않는다. 더욱이 1,260m 길이의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며 멀리 해운대와 광안대교까지 부산의 전경을 내려다보노라면 ‘부산의 진산’이라 불리는 금정산의 진면목을 느끼게 된다.

울창한 숲을 벗삼은 힐링 공간, 금강공원 케이블카 도착장에서 내려 피톤치드로 무장한 숲길로 들어선다. 몇걸음 옮기지 않았는데 자연스레 감탄사가 터진다. 도심에 이렇듯 아름다운 송림이 자리잡고 있다는 데에 놀라며 말이다.
남문을 거쳐 동문으로 나가서 온천장으로 향할 요량으로 걸음을 옮긴다. 걸음은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는다. 아니 숲이 내뿜는 피톤치드가 자연스레 걸음의 속도를 늦추는 게 맞을 것이다. 그렇게 숲에 취해 걷다가 연세가 지긋한 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금정산에 자주 오시나 봐요?”
“하루가 멀다 하고 옵니다. 부산에 전차가 다니던 시절부터 동래에서 살았으니 50년은 족히 되었네요. 금정산에서 땀 흘리고 온천에서 몸의 고단함을 푸는 즐거움이 남다르거든요. 60년대에 전차 타고 찾았던 동래는 주변에 논이 많고, 기와집이 대부분이었죠. 당시는 동래가 조그마했지만, 온천을 즐기러 오는 사람으로 바글바글했습니다.”
우연히 만난 산책길의 동반자가 들려주는 반세기 전의 추억들. 마치 선물처럼 느껴지는 과거의 야야기를 듣다 보니 어느덧 금정산성 남문에 도착했다. 산성마을을 거쳐 서문으로 향한다는 분과 헤어지며 동래온천 중 어느 곳이 좋은지 물어보았다.
“동래온천은 오랜 역사만큼 노후한 곳이 많지만, 물은 그대롭니다. 수온이 70℃를 유지할 정도로 무척 뜨겁죠. 온천물은 천 년 전 효능 그대로거든요. 전국에서 마셔도 되는 온천수는 그리 많지 않은데요. 동래온천은 마셔도 됩니다. 규모 있는 신식 온천장을 이용하려면 허심청으로 가고, 물이 좋은 것은 마찬가지니 어디를 가도 좋습니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동래온천 동문으로 나와 온천장으로 향하는 203번 버스에 올라 온천장에 도착한 시간은 15분 남짓. 주변을 살피며 걸을 요량으로 부산도시철도 1호선 온천장역 부근에서 내렸다. 역사 앞 육교에 큼지막하게 표시된 ‘천년의 신비 동래온천’이란 문구에 시선이 머문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래온천은 신라시대부터 널리 알려졌다. <삼국유사>에는 신문왕 3년(683년)에 재상 충원공이 동래온천에서 목욕했던 기록이 있고, <동국여지승람>에도 신라의 여러 왕이 목욕하러 행차했던 곳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이규보 등 당대의 유명 문인들, 조선시대에는 세종대왕의 형인 양녕대군, 퇴계 이황에게 가르침을 받은 정구 선생 등 숱한 인사가 찾았다.
동래온천의 뛰어난 수질과 관련해서는 백학전설이 유명하다. 내용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신라시대 동래 고을에 다리가 불편한 절름발이 노파가 살았다. 어느날 집 근처 논에 다리를 절뚝이는 학 한 마리가 날아왔는데, 유독 한 곳에 머물렀다. 그리고는 사흘 째 되던 날에 다리가 완쾌되어 마을 주변을 몇 바퀴 돌고는 날아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노파가 학이 있던 자리를 살피니 뜨거운 물이 솟아나고 있었고, 그 물에 다리를 담았던 노파 역시 절름거리던 다리가 조금씩 치료되었다고 한다.

동래온천, 다시 한번 도심이 되다 오랜 역사를 지닌 동래온천은 일제강점기에 전차가 개설된 이후 꾸준히 찾는 발길이 늘어갔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의 고도 성장기와 맞물려 90년대 중반까지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온천 이용객을 위해 만들었던 전차는 1968년 폐선되었지만, 동부시외버스정류장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 수많은 이용객이 모여 들었고, 1985년에는 부산도시철도 온천장역이 개통하며 대중교통의 편의성이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부산의 다른 지역이 속속 개발되며 조금씩 찾는 발길이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지역의 랜드마크였던 스파쇼핑이 부도를 냈고, 시외버스와 고속버스를 통합한 부산종합버스터미널이 노포동에 들어서며 방문객이 급감했다.
그렇게 해를 거듭하며 시대의 뒤안길로 밀려나던 동래온천이 최근 들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노천족욕탕과 스파윤슬 길이 시민의 호응을 이끌었고, 2018년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되며 지역의 쇠퇴한 산업기반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허름했던 온천시장도 현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을 거듭하고 있다.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동래온천에는 지금도 백학이 곳곳에서 당신을 반기고 있다. 100년 전 전차 개통 당시 세워진 이후 지금까지 온천장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할아버지상, 옛 동래온천의 목욕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동래별장, 동래온천의 오랜 역사가 깃든 용각과 온정개건비 등 역사의 흔적을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니 가시라. 국내 온천 중 최고라 불리는 곳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두루 느낄 수 있을 테니……


글/사진 김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