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마음 : 테마 에세이

이 봄, 사랑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

Text. 백영옥 작가

봄에는 사랑 소설을 읽는다. 이 찬란한 봄이 혹독한 겨울 때문에 더 환해진다는 사실을 끝내 알게 된 사람처럼 말이다. 이승우의 소설 <사랑의 생애>에서 “사랑할 만한 자격을 갖춰서가 아니라 사랑이 당신 속으로 들어올 때 당신은 불가피하게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은총이나 구원이 그런 것처럼 사랑은 자격의 문제와 멀리 떨어져 있다는 말을 발견했을 때, 나는 이 비범한 사랑의 고찰에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만약 사람의 몸이 ‘사랑’의 숙주일 뿐이라면 모든 면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었던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순간 저지르는 터무니없는 행동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커피를 쏟거나, 헤어진 연인에게 잠 못 드는 밤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놓고 수없이 이불킥을 날리던 날들을 말이다.

소설가 이승우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인간 숙주가 필요했던 사랑이 저지른 짓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말을 그녀에게 쏟아냈던 일,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연인의 작업실 창문에 돌멩이를 던지려 한 일, 헤어진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끊었던 일, 그에게 남긴 원망 가득한 저주의 말들까지 모두 다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동안 우리가 저질렀던 한심한 일에 면죄부가 주어진 것 같아 어쩐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내 탓이 아니다.
모두 사랑이 저지른 짓이다’라고
합리화하면서.

소설 <사랑의 생애>가 3년 전,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대학 후배 선희에게 ‘다시 사랑’을 느낀 남자의 이야기라는 건 사랑이 얼마나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사고’처럼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준다. 사랑한다고 수줍게 고백하는 선희 앞에서 자신은 누구도 사랑할 자격이 없음을 강조했던 3년 전의 그 남자, 형배에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미 사랑하는 남자 영석과 함께 행복해하던 선희에게 그는 왜 다시 사랑을 고백했을까. 이런 뜬금없음, 최악의 타이밍에 솟아난 이토록 부적절한 사랑을 형배는 왜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걸까. 사랑의 이런 속성 때문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라는 동사를 붙인다. 그렇다. 사랑은 나도 모르게 ‘빠지는 것’이다. 만약 수영을 하지 못하던 사람이 갑자기 물에 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가 사랑했던 그와 나를 사랑하는 그 사이의 나.
아담과 이브 사이에 낀 뱀처럼 곧장 삼각관계가 만들어진다.

너와 나의 사랑의 시차는 자꾸 벌어진다. 사랑이 괴로운 건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싶은 것이 그 사람의 물건이나,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가지게 되는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일단 사랑이 시작되면 우리는 ‘마음’을 가질 수 없다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다가가면 멀어지고, 멀어지면 다가오는 그 사람의 마음 앞에서 무너지게 된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때에는 유독 내가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사연이 많았다. 고백해야 할지 말지, 헤어질지 말지를 고민하는 수많은 ‘사이’에서 사랑은 그렇게 피고 지는 꽃처럼 오가다 멈추고 다시 이어진다. 사랑을 하나의 문장으로 정의내릴 수 없듯 사랑 고민에 대한 내 대답 역시 사람의 처지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사랑을 시작할지 말지에 대한 고민’에 내 대답은 이제 단순해졌다.

사랑하시라.
고백하시라.
후회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지 않아서 생기는 후회보다는 해서 생기는 후회 쪽이 낫다. 인간에게는 ‘자기 합리화’라는 방어 기제가 있다. 죽기 전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삶의 목록 중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때 그녀에게 고백해야 했다’라는 것이다. 사랑할 기회가 있었는데 잡지 않고 놓친 사람에게 남는 건 ‘후회’가 아니라 ‘회한’이다.

후회가 상처라면 회한은 흉터다.
상처는 아물지만
흉터는 희미한 자국을 남긴다.

시도했던 것에 대한 끝없는 후회에 우리는 수많은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내 경우, 실패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 많은 연애 소설은 한 줄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 쉬지 않는 질문이라는 정의 역시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에 실패한 후, 내 친구는 유학에 도전해 박사 학위를 받고 생각지도 못한 분야에서 일하게 됐다. 실패한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의 아픔에 더 깊게 공감하게 된 사람도 많다. 종종 실패는 성공보다 삶을 더 깊게 만든다. 깊어가는 봄날, 사랑 때문에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이 있다면 심리학의 지혜를 빌려 용기내 보시길. 만약 고백에 성공한다면 이루어진 사랑으로 봄빛은 더 환해질 것이고, 실패한다 해도 당신의 방어기제들이 이 실패를 앞으로의 사랑에 필요한 좋은 거름으로 사용할 테니.

백영옥

<곧, 어른의 시간이 시작된다>, <다른 남자>,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등 다수의 책과 칼럼을 썼다. 또한 ‘백영옥의 낭독’과 MBC 표준 FM ‘라디오 디톡스 백영옥입니다’의 DJ로 활동했으며, ‘라디오 북클럽 백영옥입니다’에서 탐독가로서 좋은 책을 소개하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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