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마음 : 테마 에세이

낯선 존재와
공동체 이루기

Text. 김고은 작가

집은 이미 만석이었다. 인간 넷과 개 셋이 함께 산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으므로 거실과 작은 방들은 이미 일곱 구성원의 생활에 맞게 꾸며져 있었다. 인간들이 모두 자기 앞가림을 할 만큼 크는 동안, 개들의 시간은 훨씬 더 빨리 흘렀다. 그들은 피부 알레르기와 백태로 고생하는 노견, 마취약 부작용으로 누워서 생활하는 노견, 조금만 떨어져 있어도 불안해하는 노견이 되었다. 노견 셋과 노년을 바라보는 인간 둘, 언제 이 집을 떠날지 모르는 청년 둘이 사는 집에 새로운 생명체가 들어올 자리 같은 건 없었다. 없는 줄 알았다.

더운 열기가 천천히 사그라들며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가을이었다. 어느 날 너무 작고 까매서 어디가 눈이고 어디가 털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던 아기 고양이가 마당에 등장했다. 이곳은 담장을 공유하는 수도권의 주택가였지만, 좁은 공간에 건물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었으므로 고양이가 걸어 들어올 틈새는 없었다. 그렇다고 홀로 기어오를 수도 없었으니, 누군가에 의해 마당에 도착하게 된 것이 분명했다. 홀로 덩그러니 남아 쓰레기봉투를 뜯는 아기 고양이를 보며 인간들은 당황했다. 엄마 고양이가 데리러 올 수도 있으니 지켜보기로 했다. 덕분에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노견들은 마당에 나가 흙을 파고 햇살을 쐬는 취미생활을 즐길 수 없었다.

차가운 바람이 더운 기운을 완전히 몰아냈는데도 엄마 고양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사이 아기 고양이는 마당을 점령했다. 인간 셋이 모두 나가고, 남은 인간이 늦잠을 자고 있으면 아기 고양이는 외벽을 등반해 창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신경질적으로 ‘애옹 애옹’ 울며 밥시간이 늦어졌다며 인간들을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을밤 공기가 서늘해질수록, 인간들은 마음을 졸였다. 엄마에게 생존 교육을 받지 않은 아기 고양이가 홀로 겨울을 날 수 있을까?

결국 인간들은 오랜만에 가족회의를 열었다. 격렬한 논쟁이 오갔다. 한평생 개하고만 친밀한 관계를 맺어온 이들이었으므로 고양이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아무리 인터넷을 찾고 주위에 조언을 청해도 고양이라는 생명체에 대해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들은 오로지 감에 의지해 주장을 펼쳐나갔다. 60대 남자가 말했다. “고양이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겠어? 지금 집에는 아프고 늙은 개들도 있잖아.” 20대 여자가 말했다. “집 안으로 들어와 사는 게 고양이에게는 더 불행한 일일 수도 있어.” 30대 여자가 말했다. “도시에 사는 고양이에게 생존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아?” 50대 여자가 말했다. “겨울이 되었을 때, 마당에 아기 고양이가 있으면 마음이 너무 쓰일 것 같긴 해.”

인간 넷은 자신들의 손만한 크기인 아기 고양이를 보며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낯선 존재는 두려운 대상이다. 고양이를 미워하거나 싫어해서가 아니라 잘 몰라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그렇다. 고양이와 함께하는 삶이 아픈 강아지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까, 노년의 나이에 고양이와 가까워지는 것이 무리일 수 있으니까. 고양이를 집으로 들이자고 말하는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마당에서 고양이가 죽어버리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낯선 존재의 죽음을 마주하고 괴로워지고 싶지 않으니까. 토론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사다리 타기’ 게임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가장 강력하게 집에 고양이 들이는 일을 반대했던 60대 남자는 먼저 나서서, 자신감을 가지고 오른쪽 동아줄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의도와 일치하지 않았다. 마당의 아기 고양이는 자신의 입성을 열렬히 반대한 인간이 내려준 동아줄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한 달 동안은 30대 여자의 방에만 머물렀다. 30대 여자는 짐을 다 들고 집 안에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가끔 방 안으로 들어가면 아기 고양이는 털을 세우고 목을 긁는 소리를 내며 인간을 위협했다. 그럴 때마다 30대 여자는 머리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고양이가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랬다. 그가 갑자기 뛰어올라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나도, 방충망에 달라붙어 기어 올라가도 온몸의 세포가 과민반응을 했다.

30대 여자는 고양이의 소리를 이해하기 위해 영상을 찾아봤고, 고양이의 습성을 알기 위해 책을 찾아봤다. 하악질이 상대를 해치려는 움직임이 아니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구조 요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뒤에야 더 이상 소름이 돋지 않게 됐다. 60대 남자도 엇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처음엔 아기 고양이가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만 봐도 놀라며 무서워했는데, 언젠가부터 그는 고양이에게 조금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즈음, 그는 집안의 인간들에게 고양이에 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이렇게 쭉 늘어난대. 왜냐면…”, “고양이는 어렸을 때 엄마한테 그루밍을 배운대. 근데 얘는 일찍 헤어져서…”

다시 가을이 돌아왔다. 고양이가 집에 들어온 지 일 년이 되었다. 여전히 고양이는 밥이 없으면 인간들을 호되게 혼낸다. 그러나 30대 여자는 이제 고양이의 울음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고양이는 이미 너무 밥을 많이 먹어서 거대해졌기 때문이다. 집 안의 개들보다도 크고 동네의 길고양이들보다도 크다. 아기 고양이를 거대 고양이로 키운 것은 그를 집안에 들이길 반대했던 60대 남자다. 그는 밥그릇이 비어있으면 계속 밥을 준다. 책장 사이에 몰래 숨겨놓은 간식도 가끔 꺼내주고, 때로는 주방에서 부산을 떨며 특식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완전히 달라진 60대 남자를 보며 30대 여자는 생각했다. ‘어쩌면 낯선 존재, 그래서 두렵게 느껴지는 존재와 함께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공부하는 게 아닐까?’ 하고.

김고은 작가

공부하는 인터뷰어(@goeunk1m). 인문학공동체 <문탁네트워크>에서 11년째 공부 중이다. <함께 살 수 있을까>를 썼고, <다른 이십대의 탄생>과 <낭송 사자소학>을 함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