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곁에 여행 가볼만한 국내 여행지를 추천합니다

눈부신 비경에 취하다
- 봄이 머무는 섬, 남해
태백산에서 시작해 강원도와 충청도,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진 소백산맥. 이 산맥은 거창을 지나 함양, 산청, 하동을 거치며 남녘의 바다와 만난다. 그렇게 바다 밑으로 잠시 고개를 숙였던 산맥이 다시 솟구쳐 오른 곳이 바로 경상남도 남해군이다. 이런 이유로 국내 섬 가운데 산이 가장 많고, 하천이 짧아 평야가 협소하다. 이곳에 봄기운이 머물 때면 아름다움이 더욱 빛을 발한다. 계단식 다랑이논을 만들며 척박한 땅에 터를 일군 선조의 흔적마저 남다른 정취에 힘을 보태는 곳으로 가보자.


억척스런 삶이 꽃으로 피어난
가천다랭이마을
하동을 지나 남해대교를 건너자마자 눈앞이 환해진다. 쪽빛을 머금은 바다, 꽃에서 녹음으로 변화가 진행 중인 초록의 터널, 노랗게 물들어 바람에 맞춰 춤사위를 펼치는 유채의 물결, 점점이 떠 있는 섬까지 최적의 앙상블을 만들기 때문이다. 시선이 향하는 곳마다 겨우내 애타게 봄소식을 기다린 상춘객을 유혹한다. 굽이길을 지나면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감이 샘솟는다. 남해의 여러 이정표를 뿌리치고 한달음에 달려간 곳은 계단식 논으로 유명한 가천다랭이마을이다.
마을을 거닐다 만난 어르신은 여행객에게 마을의 속살을 전하고 싶어 한다. 이색적인 풍경을 자아내는 다랑이논마저 “그게 어떻게 만든 건데…”로 시작하며 아버지와 할아버지, 윗대 선조의 삶까지 세월을 되짚는다. “옛날에는 왜 그리 아이를 많이 낳았는지… 식구들 먹여 살리려면 땅을 넓혀야 했어요. 바다에 의지할 수 없으니 농사밖에 방도가 없었죠. 마을 주변의 다랑이논이야 거의 완성되었지만, 경작지는 여전히 부족했어요. 그래서 산기슭에 농지를 만들려고 어른들이 무척 고생했죠. 경사가 심한 곳에 농지를 만들자니 석축을 쌓는 거 외에는 방도가 없어요. 그렇게 돌을 쌓고 흙 고르기를 몇 날 며칠 해야 한 뼘 땅이 생겨요. 그런 논이 저 설흘산(481m)과 응봉산(412m) 7부 능선까지 걸쳐 있어요.”
경사가 심한 탓에 모든 일은 지게로 지어 날랐다. 집집마다 외양간이 있어 소 한 마리씩 키웠고, 두엄이 나오면 모았다가 지고 올랐다. 다랑이논은 삶에 대한 애착과 사무친 아픔이 차곡차곡 쌓인 흔적이나 진배없다. 다랭이마을이 이토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억척스런 삶이 꽃으로 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남해 주민의 고달팠던 삶이 닮긴
삿갓배미
연세 지긋한 주민과 나눈 이야기를 마음에 담고 길 위에 오른다. 그제야 바다와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라고만 여겼던 다랑이논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다. 한 뼘을 넓히면 가족의 한 끼를 해결할 밥이 나오고, 열 길 넓혀야 아이들 학비를 건질 수 있었던 시절. 그런 맘으로 어스름에 집을 나서 해가 떨어져야 돌아왔을 우리네 아버지의 노고를 헤아려 본다.
마침 마을 입구에서 작디작은 배미 하나를 발견한다. ‘삿갓배미’라는 안내문이 붙은 농지에 대한 일화가 재미있다. 옛날 한 농부가 해질 무렵 집으로 향하기 전에 논의 숫자를 헤아리니 한 배미가 모자랐다. 이상하다 싶어 몇 번을 헤아려도 하나가 부족했다. 결국 포기한 채 집에 가려고 벗어둔 삿갓을 들어 보니 그 밑에 논 한 배미가 있었다는 내용이다. 산비탈의 자투리땅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논으로 만들었던 주민들의 고달팠던 삶이 느껴진다. 다랭이마을에는 그러한 계단식 논이 108층이나 된다. 삿갓배미처럼 작은 땅부터 경사에 따라 크기도 다양한 논이 483개나 된다.

다랭이마을의 다랑이논은 2005년에 국가명승지 15호로 지정되었다. 오래 전부터 다랑이에 농사를 짓는 농민이 차츰 줄어들던 터에 명승지 지정으로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외형이 보존될 수 있어 다행이지 싶다. 남해는 언제든 다시 찾을 곳이기에 지금의 아름다움과 조우해야 하니 말이다.

아름다운 유채꽃으로 유혹하는
두모마을
앵강만을 사이에 놓고 다랭이마을과 으뜸과 버금을 주고받는 두모마을을 빼놓자니 아쉽다. 아이 품은 어머니 형상을 하고 있는 남해군의 남쪽 해안 절경은 주로 앵강만을 가운데 놓고 펼쳐져 있다. 만의 서쪽에 다랭이마을이 있다면, 동쪽의 대표적인 마을이 바로 두모마을이다. 두모리의 본래 지명은 ‘드므개’로 해안가 포구의 모습이 마치 궁궐 처마 밑에 물을 담아두었던 큰 항아리 ‘드므’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수려한 산세를 품은 마을의 형태가 작두콩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콩 두(豆)와 털 모(毛)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두모마을 역시 유채꽃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급경사를 이룬 다랭이마을과 달리 두모마을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해 다랑이 하나의 면적이 넓다. 이런 이유로 곳곳에서 흐드러진 유채를 배경으로 상춘객의 기념촬영이 한창이다. 정겹게 팔짱을 끼고 촬영 중인 커플, 삼각대에 거치한 카메라 앞에서 점프하며 재밌는 포즈를 취하는 친구들, 꽃밭에서 숨바꼭질 중인 아이까지 봄을 봄답게 즐기는 사람들의 정겨움이 넘친다. 가족 단위 여행객도 두모마을을 많이 찾는다. 마을 진입로에 조성된 유채꽃 메밀꽃 단지를 비롯해 캠핑장까지 갖추었고, 금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하천과 수심이 완만한 해안이 있어 물놀이와 해양생물 채집도 즐길 수 있어 그렇다.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유일한 산악공원,
금산
남해는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즐기는 재미도 쏠쏠하다. 통영시 한산도부터 여수까지 걸쳐 있는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중심을 지키며 수려한 남쪽 해안의 아름다움을 두루 품었기 때문이다. 또한 남해에서 가장 빼어난 풍광을 지녔다는 상주은모래비치를 비롯해 왕지벚꽃길, 지족해협 죽방렴, 남해의 보석이라는 미조항 등 여행자의 오감을 자극하는 곳을 109km 길이의 일주도로를 통해 만날 수 있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보다 높은 곳에서 한눈에 조망하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이러한 유혹을 나침반 삼아 소백산맥의 대미를 장식하며 기암괴석이 산 전체를 감싼 곳으로 향한다. 앞에는 해금강이요, 뒤로는 만물상을 품었다는 남해 금산(701m)이 바로 그곳이다. 한려해상국립공원 내의 유일한 산악공원인 금산은 금강산을 빼닮았다 하여 소금강 혹은 남해금강이라 불린다.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기도한 뒤 조선을 건국했다고 하니 신성한 기운까지 느껴진다. 동해의 낙산사, 강화도의 보문사와 더불어 대한민국 3대 기도처 중 하나인 보리암이 금산에 자리 잡은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남해의 봄도 눈부신 비경에 취해 더 오래 머무는 듯 느껴진다.

글/사진 김용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