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넌 : 한난 통신

우리 엄마와 아빠도 돌봄이 필요해!

Text. 성규아빠

한국지역난방공사 ‘아빠 육아휴직 체험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 한난은 지난해 11월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직원들을 대상으로 ‘아빠 육아휴직 체험수기 공모전’을 진행했습니다. 그 결과 체험수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을 소개합니다.

지금이야 육아휴직을 하는 용기가 있는 동지들이 많아졌지만, 내가 육아휴직을 신청할 때인 2018년에는 금단의 열매를 따는 일이었다. 아들 둘과 아내가 있는 외벌이 가장이 긴 육아휴직에 들어갈 때 주변 지인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용기와 조언을 건네는 분들도 계셨지만, 좋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보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금전적인 어려움, 혹은 회사생활을 포기하더라도 다시는 얻을 수 없는 더 가치있는 일들을 해낼 수 있는 시기였다.

남성 육아휴직에 있어 선구자적인 선배와 동기가 없어서 육아휴직을 신청하고 어디에서 지원금을 받아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이 없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판다고 스스로 찾아서 얻어야 하는 일이었다. 인터넷과 고용보험센터 홈페이지를 통해 알아보았으나 생소한 단어들과 복잡한 설명으로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럴 땐 직접 만나보고 의견자문을 구하는 게 최고이다. 지역 고용보험센터를 찾아가니 육아휴직수당 신청을 위해 작성해야 할 것들을 안내해 주었다. 육아휴직을 알리고 준비한 서류를 내어 보이자 남자들의 육아휴직은 참 드물다면서 그제야 담당자가 용기 있는 선택을 존중해 주었다. 왠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것 마냥 ‘이게 맞는 일일까?’ 멀뚱멀뚱 서 있는 나에게 아내는 자기 친구들 남편 중에 제일 멋지다고 나를 꼭 안아주었다. 한 번의 방문으로 월 육아수당을 책정하고 매달 신청하는 방법과 필요서류들을 챙겨주었다.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육아휴직지원금은 갑자기 바뀐 우리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복직 6개월 이후 들어오는 지원금도 그간 ‘고생했다’는 상처럼 달콤했다.

내 육아휴직의 시작은 이제 막 돌이 지난 젖먹이 둘째 아들과 동생에게 사랑을 양보한 첫째 아들, 이 둘 사이에서 매일같이 전쟁을 치르는 아내, 그리고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 아버지의 병간호까지 지금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부서질 것만 같은 온 집안 식구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평소 모든 것을 스스로 하시던 아버지는 이제 물도 혼자 드시기 힘들어 하셨다. 병원 통원치료와 식사를 옆에서 준비해드리고 병간호를 하였다. 건강하셨던 아버지의 몸에 점점 여러 가지 배액관들이 연결되었고 활활 타오르던 아버지는 바람 앞 촛불처럼 점점 사그라지는 것 같았다. 내 삶에서 단단하고 멋진 모습만을 보여주시던 나의 우상이 작아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도 힘이 들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눈물을 숨겼다. 너무도 슬픔이 벅차오르는 날엔 아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가 되었다. 그렇게 육아휴직 한 달 반 만에 아버지는 우리의 곁을 떠나셨다. 육아휴직이 없었다면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그렇게 오랫동안 같이 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이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던 것처럼 아버지에게도 내가 위로가 되었을까? 돌아보니 아쉬움이 가득한 짧았던 내 인생의 아버지와의 한 달이었다.

장례를 치르고 본격적으로 육아를 분담하였다. 그동안 혼자서 고생했을 그리고 복직 후에 또다시 고생할 아내를 위해 식사 준비와 젖먹이를 제외한 모든 부분을 내가 하고자 했다.

눈뜨면 출근하고 퇴근하면 도와주는 육아가 아닌 직접 투입된 육아의 현장은 전쟁터와 다르지 않았다. 주말이면 7시에 일어나는 아이들이 평일에는 등원 시간이 다가와도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눈도 못 뜨는 아이들의 까치집 머리를 정리해주고 입에 씨리얼이라도 욱여 넣어준 후 바쁜 걸음으로 아이들을 업어서 등원시켜주었다. 왜 항상 같은 바지만 고집하는지, 옷을 다 입히면 화장실이 가고싶은지 이해 불가한 날들이었지만 처음이 어색했지 점점 능숙하게 되어 아내보다 더 빠르게 등원을 시키는 나를 발견하였다.

아이들의 목욕은 내 담당이었는데 왜 그리 이를 안 닦으려 하는지 어릴적 나를 똑 닮았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나면 비로소 엉망이 된 집안을 정리하고 아내와 같이 늦은 아침을 마주 앉아 먹었다. 늘 아이들과 같이 식사해서 아내와 단둘이 식사를 해본 것이 얼마만인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틀고 웃어가면서 식사하는 시간이 슬픔을 이겨내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바로 일을 시작했다면 몰랐을 감사하고 소중하고 소소한 날들이었다. 육아휴직이지만 마냥 아이만 보고 집안일만 하기에는 이 시간이 아까웠다. 평소 생각만 하고 있었지만, 실천을 못한 기술사 공부를 아이들 등원 후에 도서관에서 시작했다. 남들은 3개월 한다는 육아휴직. 우리 회사 남자직원 최초로 2년을 꼬박 채운 후 복직하기 하루 전날 2월 1일. 이날은 사랑하는 아버지가 주신 나의 생일날이자 기술사 시험날이었다. 복직 전날이 시험이라니…. 너무 하지 않은가? 복직에 대한 두려움과 2년의 공백에 대한 걱정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생일날 차가운 김밥을 먹으며 기술사 시험을 치렀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합격이라는 복직기념 선물을 받았다. 자격증 취득 이후 현장에서 설비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음을 스스로 느꼈다. 계통을 조금 더 정확히 이해했고 각각의 설비들의 유기적인 관계에 흥미를 느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개발원에서 HRSG*에 대한 강의를 하였고 누군가에게 나의 지식을 공유한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은 나에게 회사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복직 후 화장실에서 혼자 울면서 밥을 먹을까봐 걱정했다는 아내의 말과 다르게 부서 사람들은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주었고 과분하게도 과장이라는 감사한 자리에 올 수 있었다. 회사에서 나에게 흔쾌히 육아휴직을 허락해 주었기에, 팀원들이 믿어주었기에 얻을 수 있었던 감사한 일이다. 육아로 지쳐있던 아내의 얼굴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았고 아빠의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아이들과는 많은 시간을 같이 나누었다. 남편을 잃고 힘들어 하시던 어머니께서는 내가 많은 위로와 기댈 수 있는 든든함으로 다가왔었다고 하셨다.

육아와 가사가 여자만의 일이라는 말도 이젠 옛말이다. 가부장제 꼰대를 탈출하기 위해선 육아에 참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과 행동이 중요하다. 물론 여러 가지 걸림돌이 육아휴직이라는 선택을 어렵게 만들겠지만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평생 기억에 남을 추억을 내 머릿속에 새겨놓았다. 이것이 나의 육아휴직에 있어서 가장 큰 성과이자 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아직도 남성 육아휴직에는 많은 제약과 차가운 시선들이 동반된다. ‘쉬는 동안 동기들은 다 승진하고 복직하면 어떻게 할 거냐? 외벌이인데 생활비는 어찌할 거냐?’ 하지만 나에게 2년간의 육아휴직은 아버지와의 마지막을 정리하고 어머니와 함께 슬픔을 이겨낸 위로의 시간이었으며 내 슬픔의 빈자리는 아이들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감사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지금도 아이들이 나의 육아휴직 기간 동안, 같이 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분명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많았던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육아휴직의 선배로서 앞으로 육아휴직을 계획 혹은 고민하는 분들께 말하고 싶다. 깊은 고민은 하되 결정은 빠르게 그리고 후회는 없을 당신의 육아휴직을 응원한다.
* HRSG(배열회수보일러) : 가스 터빈 운전 시 발생하는 고온의 폐열을 회수하여 증기 터빈에 재공급하는 장치

육아휴직이란?

* 육아휴직은 근로자의 육아부담을 해소하고 계속 근로를 지원함으로써 근로자의 생활안정 및 고용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기업의 숙련인력 확보를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20.2.28부터는 부부가 동시에 육아휴직 신청이 가능하고, 임신 중 육아휴직은 ’21.11.19부터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