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스마트에너지도시 소개 사람을 위한 스마트시티
헬싱키 칼라사타마

대다수 스마트시티는 탄소 중립, 디지털 뉴딜과 같은 화두를 전면에 내세운다. 첨단 정보통신기술(ICT)로 구현하는 영화와 같은 미래상도 단골 메뉴다. 하지만 북유럽을 대표하는 스마트시티로 떠오른 헬싱키 칼라사타마는 다르다. 시민들의 시간을 매일 1시간씩 아껴주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ICT는 이를 위한 도구이며, 탄소 중립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얻게 될 부산물일 뿐이다. 기술보다 사람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사람이 행복한 공간으로서의 스마트시티를 지향하는 칼라사타마의 오늘을 들여다보자.

글. 양철승(과학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Sensible4, Landezine Award, City of Helsink, Smart Kalasatama, SRV, Virta


버려진 항구의 화려한 변신 지난 2007년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항구지대인 칼라사타마(Kalasatama)에 지하철역이 들어섰다. 하지만 헬싱키 시민들은 이곳을 ‘아무도 내리지 않는 역’이라 불렀다. 당시 칼라사타마는 낡은 공장과 건물, 을씨년스러운 석탄화력발전소가 전부인 황무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철도와 항만이 건설되며 황금기를 누렸던 칼라사타마는 20세기 들어 주변에 새로운 항구가 생기면서 급격한 쇠퇴에 직면했다. 하루하루 입항하는 선박이 뜸해졌고, 항구는 기능을 잃어갔다. 지하철역이 생긴 시점에 이곳은 ‘버려진 항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랬던 칼라사타마는 지난 2013년부터 화려한 변신을 시작했다. 헬싱키가 오는 2035년까지 탄소배출을 제로화하겠다는 계획을 천명하며 칼라사타마를 친환경 스마트시티의 거점이자 살아 움직이는 리빙랩(생활실험실, Living Lab)으로 육성키로 한 것. 칼라사타마는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발전소를 철거했고, 시민들은 리빙랩 시스템을 통해 기업들이 개발 중인 기술을 체험해보기로 했다. 이를 위해 오는 2040년까지 헬싱키가 6억 유로, 민간이 50억 유로를 투자하는 총 56억 유로(약 7조 6,000억 원) 규모의 ‘스마트 칼라사타마 프로젝트’를 론칭했다. 8년이 지난 현재 칼라사타마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북유럽 최고의 스마트시티 중 하나로 거듭났다. 전문가들은 도태된 옛 항구지역이 이처럼 이른 시간 안에 글로벌 톱티어 스마트시티로 변화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여타 스마트시티와 차별화된 접근방식이 있었다고 강조한다. 기술이 아닌 사람 중심의 스마트 혁신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질을 높여줄 ‘하루 1시간’ 실제로 헬싱키는 ‘스마트 칼라사타마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자율주행차가 도로를 점령하고 드론 택시가 날아다니는 세상을 묘사하지 않았다. 단 하나의 명확한 이상은 ‘하루 한 시간 더(One more hour a day)’였다. 건축, 에너지, 모빌리티, 의료, 생활폐기물 처리 등 도시 생활 전반에서 조금씩 시민들의 시간을 아껴 하루 1시간의 여유를 더 누릴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의미다. 삶의 질이 높아지면 생산성도 올라간다는 게 헬싱키의 포부이다. 복지의 천국답게 스마트시티 또한 시민복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칼라사타마에는 독특한 스마트시티 기술들이 다수 눈에 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사물인터넷(IoT)과 스마트그리드에 기반한 에너지시스템이다. 칼라사타마에 새로 건설된 모든 아파트에는 스마트미터가 채용돼 있으며, 에어컨·조명·스토브·인덕션 등 12개 항목별 전력사용량을 스마트폰 앱으로 실시간 파악할 수 있다. 덕분에 시민들은 불필요한 전등을 끄거나 전기료가 비싼 집중 시간대를 피해 세탁기를 이용하는 식의 똑똑한 전력 소비가 몸에 뱄다. 스마트미터의 정보는 전력회사에도 전달돼 전력 검침 인력과 비용절감이 가능하다.



쓰레기차·쓰레기통이 없는 도시 칼라사타마의 또 다른 독창적 시스템은 생활폐기물 처리시스템이다. 쓰레기 수거 차량을 이용하는 전통적 방식을 탈피해, 도시 전체에 쓰레기 수거를 위한 지하 진공관을 매설했다. 시민들이 거주지 인근의 투입구에 쓰레기를 넣으면 시속 70km의 속도로 집하장에 직송된다. 이 때문에 칼라사타마에는 쓰레기차가 단 1대도 없으며, 거리에서 쓰레기더미도 볼 수 없다. 쓰레기차 운용에 따른 막대한 화석연료 소비를 줄일 수 있음은 물론, 도시미관과 악취·청결 측면의 효과도 상당하다는 평가다. 그뿐만 아니라 자원 순환을 위한 분리수거도 철저하다. 투입구는 음식물쓰레기, 종이, 판지, 혼합쓰레기, 플라스틱 포장재 등 5개로 구분돼 있으며, 가구마다 발급된 카드를 접촉하면 입구가 열린다. 비용은 투입된 쓰레기의 중량을 자동 측정해 매월 청구된다. 이 같은 지하 진공관 집하 시스템은 핀란드 회사 엔백(Envac)이 개발해 칼라사타마에 첫 상용화한 것으로, 효용성을 인정받아 많은 신도시에 적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세종시와 인천 송도신도시 등의 아파트단지에 도입돼 있다. 이밖에 태양열과 풍력 발전기로 전기를 생산하는 공용 도서관과 냉장고 컨테이너 등을 운영 중이다. 또한, 지열을 이용해 데운 물을 난방에 활용하고, 지하동굴의 찬물을 냉방에 사용한다. 특히 헬싱키는 플라스틱 재활용 효과에 주목하고 있다. 이 시스템을 중심으로 현재 6%인 플라스틱 재활용 비율을 60~70%까지 높여 연간 33만 6,000톤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인다는 목표다.

전기차 기반 스마트 모빌리티의 천국 전기차는 모든 스마트시티에서 모빌리티 혁신의 중심에 서 있다. 칼라사타마도 다르지 않다. 화석연료 차량의 퇴출과 전기차 보급 확대 정책을 활발히 펼치고 있는 것. 또한, 전기차 보급을 저해하는 최대 요인이 충전 인프라의 부족에 있다고 보고 인프라 확충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현재 칼라사타마의 전체 주차공간 중 무려 1/3에 전기차 충전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전기차 이용자들이 전기충전소를 찾아 헤맬 일이 없다는 얘기다. 전기차 공유시스템도 일찌감치 구축해 운용하고 있다. 신규 주택단지마다 시민들이 언제든지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공유 전기차를 배치한 것. 이렇게 비용과 편의성 모두에서 공유 전기차가 우위를 점하면서 자가용을 이용하는 시민들이 줄어들고 있다. 이와 함께 무인자율주행 전기ㅅ버스 도입에도 속도를 높이고 있다. 지난 2019년 센시티브4(Sensitive4)가 개발한 16인승 자율주행 전기셔틀버스 ‘가차(GACHA)’를 시범 운영한 데 이어 상용운행을 위한 기술 고도화에 나선 상태다. 이외에도 칼라사타마에는 현재 드론 배송, 배송 로봇, 인공지능, 태양광·지열발전, 디지털트윈, 하늘정원 등 리빙랩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1,000여 개 이상의 스마트시티 프로젝트들을 수행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오는 2035년까지 2만 5,000명의 거주공간과 1만 명의 일자리를 갖춘 시민 중심 스마트시티를 완성하고자 한다. 단 8년 만에 버려진 항구에서 4,000여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활기찬 도시로 변모한 만큼 헬싱키는 목표 달성을 자신하고 있다.